- 성녀 마리 유프라시아
- 성 요한 에우데스
- 복녀 마리아 드로스트
- 복녀 마리 데레즈 드 수비랑
- 복녀 마리아 아구치다 리바스
성녀 마리 유프라시아(1796-1868)
“나는 부도 재능도 그 어떤 매력도 지니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항상 사랑했습니다. 내 영혼의 온 힘을 다하여 사랑했습니다.”
성녀 마리 유프라시아 펠티에는 프랑스 서부의 작은 섬 느와무티에에서 의사인 아버지와 신앙심 깊은 어머니 사이에서 1796년 7월 31일 태어났습니다. 영혼 구원에 관한 관심과 열정이 강했던 그녀는 1814년 요한 에우데스 성인이 창립한 ‘애덕 성모 수녀회’에 입회하였습니다. 1825년, 29세에 원장수녀로 선출되었으며 그녀의 영적 지도력 아래 공동체와 사도직은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 해에 그녀는 소녀들과 여성들 중에서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바치기를 원하는 이들을 위해 관상 수녀원(현재의 착한 목자 관상공동체)을 설립하였습니다. 1829년 앙제의 주교님의 요청으로 수녀원을 설립하였으며, 앙제 수녀원을 모원으로 하는 총원제도를 1835년 교회로부터 인가받아 전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착한 목자 애덕 성모 수녀회’를 창립하였습니다. 성녀는 전 생애를 상처받은 소녀들과 여성들의 구원을 위해 헌신하였고, 전 세계에 110개의 분원을 설립하였습니다. 성녀는 1868년 4월 24일 착한 목자 수녀들에게 십자가의 사랑과 영혼 구원을 위한 열성을 유산으로 남기고 선종하였습니다. 1940년 5월 2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 되었습니다.
성 요한 에우데스(1601-1680)
“예수님,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들 하나 하나, 나의 숨결들 하나 하나, 내 심장의 박동들 하나 하나,
나의 삶의 순간 순간들이 내가 당신을 끊임없이 그리고 영원히 갈망하는 수많은 소리들로 바뀌도록 바라나이다.”
예수성심과 성모성심에 깊은 영성가이며 사도였던 성 요한 에우데스는 프랑스 노르망디의 뿌리 깊은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사목자로서의 그의 삶은 예수성심 안에서 관상한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깊은 신뢰와 예수성심과 완전히 일치되어 있는 성모성심에 대한 의탁으로부터 흘러나왔습니다. 사제가 된 후 45년 동안 전교 여행을 계속하면서 그는 강론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을 전하였으며 사제들의 양성과 교육, 성화를 위해 신학교를 세웠고, 예수 마리아 수도회(현재의 유디스트회)를 창립했습니다. 또한 1641년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구원을 위해 헌신하는 애덕 성모 수녀회(착한목자 수녀회의 모체)를 창립하였습니다. 예수성심과 성모성심의 열렬한 사도였던 그는 예수와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꾸준히 전파하였으며 이 신심을 처음으로 전례화 함으로써 당시 신앙생활에 커다란 쇄신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에 관한 탁월한 저술을 유산으로 남기고 1680년 8월 19일 선종하였으며 1925년 시성 되었습니다.
복녀 마리아 드로스트(1863-1899)
“오 예수님의 거룩하신 성심이여 저를 오직 당신의 뜻대로 쓰소서. 저는 당신의 더욱 큰 영광과 당신의 거룩한 사랑 이외의 어떠한 보상도 열망치 않고 있나이다.”
복녀 마리아 드로스트는 1863년 9월 8일 독일 뮌스터의 신심 깊은 백작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수도 성소를 갈망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수녀회에 들어갈 수 없음을 알게 되자 사적으로 동정 서원을 했으며, 집에서 가족들과 같이 지내면서 독거와 기도 생활을 하였습니다. 1886년 건강이 회복되었을 때, 병원에서 만난 어떤 불행한 여성을 통하여 착한목자수녀회로의 부르심을 깨닫게 되어 1888년 수녀회에 입회하였습니다. 입회 후 그녀는 질병과 빈곤으로 고통받았으나 사람들을 예수성심의 자비로운 사랑으로 이끄는 데 자신의 삶을 바쳤습니다. 점진적인 마비를 수반하는 척추병으로 임종이 가까웠을 때, 그녀는 교황 레오 13세께 전 세계를 예수 성심께 봉헌하기를 청원하였습니다. 이 청원이 이루어지기 3일 전인 1899년 6월 8일 선종하였으며, 1899년 6월 11일 교황 레오 13세는 전 세계를 예수 성심께 봉헌하였습니다. 그녀의 삶과 예수성심께 대한 사랑을 인정한 교황 바오로 6세는 1975년 마리아 드로스트를 복녀로 시복하였습니다.
복녀 마리 데레즈 드 수비랑(1834-1889)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내 삶의 이야기 속에서 이를 깨달았습니다. 나의 생애는 애초부터 그분께서 내 마음 속에다 끊임없이 쓰시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1834년 남프랑스 옛 귀족 가문의 신앙심 깊은 집안에서 출생한 복녀 마리 데레즈 드 수비랑은 성직자였던 삼촌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수도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특별히 관상수도회에 마음을 두었습니다. 19세 되던 해인 1854년 평신도 봉헌단체인 베긴(Beguinage)회의 책임자로 일하게 된 그녀는 기도와 노동을 하면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1861년에는 프랑스 남부 도시 툴루즈에서 「가족의 집」이라는 이름의 기숙사를 개소하여 노동자들과 빈곤에 허덕이는 과부, 미혼여성과 소녀들, 병자들을 돌보았으며 유럽 최초의 결핵 요양소를 설립하였고, 공제조합과 보험제도 개설 등 선구자적 활동을 하였습니다. 1864년 도움이신 마리아 수녀회를 시작하였으나, 1874년 수녀회에서 추방당하는 일을 겪게 됩니다. 이후 1874년 애덕 성모 수녀회에 입회하여 수도 생활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녀는 육체적인 질병으로 인한 커다란 고통과 수많은 영적 시련을 겪으면서도 희생과 보속의 거룩한 삶을 살았으며 1889년 6월 7일 애덕 성모 수녀회 수녀로서 선종하였습니다. 사후 복녀 마리 데레즈 드 수비랑은 도움이신 마리아 수녀회의 창립자로서 받아들여졌으며, 그녀가 그토록 사랑한 도움이신 마리아 수녀회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복녀 마리아 아구치다 리바스(1920-1990)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므로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날, 나는 빈 손으로 나 자신을 주님께 보여 드리게 될 것입니다.”
복녀 마리아 아구치다는 1920년 페루의 아야카초의 코라코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자녀들에게 깊은 신앙의 환경에서 자라도록 했으며,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하여 겸손하였고, 이해와 봉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였습니다.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착한 목자 수녀회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공부했던 아구치다는 수도 성소의 부르심을 받고 1940년 수녀회에 입회합니다. 1949년 종신서원을 한 이후, 수녀회의 양성소 및 소녀들을 위한 기숙사, 세탁 임무 또는 양성 보조자 등 다양한 소임에 충실했습니다. 1980년 이후 수녀회는 페루의 찬차마요의 라 플로리다 정글 마을의 원주민, 특히 그곳의 여성과 소녀들의 삶을 증진 시키는 센터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해, 페루 공산당 센데로 루미노소(Shining Path)는 테러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88년 3월, 아구치타는 라 플로리다에 파견되었고, 비록 그곳이 아주 위험한 지역임을 알고 있었지만, 열성적으로 지역 공동체를 돕고 여성들의 삶의 질을 발전시키는데 투신하였습니다. 그녀는 1990년 9월 27일 테러 집단에 의해 다섯 명의 마을 사람들과 함께 처형당합니다. 아구치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녀로 확인되어, 2022년 5월 7일 시복되었습니다.